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1920년 조선시대 기생 지조와 절개의 표상 부산 동래기생 컬러복원 영상 최초공개 (1920 Joseon Dynasty Gisaeng color restoration video)
    1920년대 2021. 4. 15. 11:03

    1920년 조선시대 기생 지조와 절개의 표상 부산 동래기생 컬러복원 영상 최초공개 (1920 Joseon Dynasty Gisaeng color restoration video)

     

    #1920 #조선시대 #기생

     

    ▶복원왕 구독해주세요👍 : https://bit.ly/2Vhlf3l

    100년이 넘은 오래된 흑백 사진을 컬러로 복원해 봤습니다.

    영상에 나오는것처럼 사진의 표면도 일반적인 종이가 아니기에

    정말 조심스럽게 작업을 진행 하였습니다.

    재밌게 봐주세요

    ─────────────────────

    구독자분들의 좋아요 와 댓글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youtu.be/sFUyoo2YeUI

    ● 설명 Dongnae Gisaeng of the Joseon Dynasty 지조(志操)와 절개(節槪)의 표상 ‘동래 기생’ 동래의 관기 부산의 옛인 동래에 언제부터 관기제도가 있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임진왜란 전후에 그 제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임진왜란 이후는 동래도호부가 일본과의 외교적 절차와 접대를 전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일본과 외교는 왜관 밖에 있었던 연향대청(宴饗大廳)에서(지금의 광일초등학교 자리) 주로 행해 졌으며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들이 회담에 앞서 연회(宴會)가 베풀어지고 그 연회의 여흥으로 우리의 가무기(歌舞技)가 연희(演戱)되었다고 합니다. 그럴 때의 연희는 동래부의 관기가 맡아야 했으며 동래 관기들은 그러한 외교사절을 맞을 때 뿐 아니라 조정에서 고관이 내려올 때 동래부에서 잔치가 있을 때면 그 잔치에 흥을 더하기 위해 가무기를 연희했다네요 그 가무기의 기량을 자랑하는 관기는 관기청(官妓廳)에서 관장했는데 동래부 관기청은 오늘날의 수안동에 남아 있는 동헌(東軒 : 부사의 집무처) 남쪽자리에 있으며 관기의 교양과 기량을 닦는 교방은 그 당시 도화동(桃花洞)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지금의 학소대 남쪽에 있었다고 전해진다고 합니다. 관기제도는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 없어지고 관기는 민간사회로 풀려나서 민기(民妓)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민기들은 1910년 엄격한 규율 아래 행동의 제약을 받아야 하는 '동래기생조합'을 조직했다고 합니다. 1912년에는 '동래예기(藝妓)조합'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날의 동래구 명륜동에 자리를 잡았다네요 이때부터 민간인의 주연(酒宴)자리에 값진 한복에 분단장을 하고 거문고 또는 가야금, 북, 장구를 가져가서 기악과 노래와 춤으로 주흥을 돋웠다.고 합니다. 그 '동래기예조합'은 1935년 무렵 동래온천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광복 후는 국악원(國樂院)으로 이름이 바뀌고 오늘날에는 여기(女妓)와는 관계가 멀어진 '동래국악진흥회'가 되어 우리 고유의 국악전수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35년 간의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서를 말살하려고 기류(妓流)를 탄압했는데도 우리의 노래인 창(唱)과 거문고와 가야금의 주법(奏法)과 우리 고유의 춤을 기류들이 지켜 왔다. 그들은 전통 국악의 계승자였다. 동래의 민기(民妓)는 기류라 해도 세간에서 일컬어진 남성에 희롱되는 천박의 여인이 아니었다. 관기의 후예였다. 절개와 의리에 살았다. 동래기녀 출신 한동연 여사는 사회사업에 헌신하여 지역 주민의 칭송을 받으면서 그 사회사업에 뜻을 같이한 김만일 목사와 결혼을 하여 여생을 유감 없이 마쳤다. 그들 가운데는 우리의 풍악과 풍류로 얻은 수입으로 형제자매나 이웃 자제를 공부시켜 나라의 동량재가 되게 한 바도 적지 않다. 사라져 버린 동래기생 이 기계(妓界)가 쇠퇴한 것은 광복 이후 한국전쟁을 맞고 미군이 주둔하고 서구의 퇴폐문명이 물밀 듯 들어오면서 성도덕이 문란해진데 있었다. 그 날의 기류들은 세태 따라 생겨난 창녀가 될 수도, 창녀로 오해받을 수도 없었다. 서구식 악기와 노래와 춤이 판을 쳤기 때문에 설자리를 잃었다. 뿔뿔이 흩어졌다. 오늘에서 생각하면 그 날에 가졌던 그들의 자취에 아쉬움과 그리움이 간다. 출처 : 부산광역시 부산시보 지조와 절개의 표상 동래기생편 참조 www.busan.go.kr/news/specnews/view?dataNo=41263

Designed by Tistory.